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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스파이어] 서른 아홉 ‘한 차장’, 늦깎이 뮤지션이 되다
[이정아 기자의 인스파이어]


투우장에는 소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공간이 있다. 소가 숨을 고르는 곳, 바로 퀘렌시아(Querencia)다. 투우사와 싸우다가 지친 소는 자신이 정한 그 장소로 가서 마지막 힘을 모은다. 그곳에 있으면 소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퀘렌시아, 스페인어로 ‘피난처’, ‘안식처’라는 뜻이다.

불과 두 달 전까지 ‘한 차장’으로 불렸던, 직장 생활 10년 차 조한(본명 한승조) 씨의 퀘렌시아는 ‘음악’이었다. 쳇바퀴 같은 삶을 사는 평범한 대한민국 직장인이었던 그가 마음 놓고 노래를 부르는 곳, 음표를 새로 하나하나 악보에 새기는 곳, 본인의 자기 자신에 가장 가까워지는 곳, 따뜻하고 편안한 그만의 작은 영역.

“회사 다니면서 직장인 밴드도 하고, 여자친구를 위해서 노래도 만들기도 했어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음악은 제게 그냥 단순한 피난처가 아니더라고요. 제 삶이었어요.”

10년 동안 수입차 회사의 홍보담당자로 근무하며 커리어를 쌓았던 그는 불혹의 나이를 앞두고 지난 3월 회사를 그만뒀다.




# 서른아홉,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나이 앞자리가 4로 바뀌면 도전하지 못할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인지 회사에 사직서를 낼 때 오히려 마음이 편했어요. 이제 회사를 그만두는 거구나, 받아들이니까 오히려 설레는 감정이 컸다고 해야 할까.”

‘직무의 사임’을 뜻하는 사표(辭表)는 그에게 곧 시작을 의미했다. 서른아홉 늦깎이로 뮤지션에 도전한 그의 첫 음반 재킷에도, ‘시작’이라는 이름이 박혔다.

이 새로운 시작에 대해 어떤 이들은 당황하기도 했고, 순간적인 일탈이 아니냐는 시선을 보이기도 했다. 인정받던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접고, 마흔이라는 나이에 음악인의 길을 걷는다는 것에 대한 걱정 어린 반응도 있었다.

이런 시선에 대해 그가 대답했다.

“언젠가는 음악을 하겠다는 꿈을 갖고 살았어요. 그래서 회사를 그만둔 게 단순한 일탈이 아니에요. 저에게는 꼭 거쳐야 될 과정이었어요.”

그는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연습실로 ‘출근’하며 맡는 공기가 그렇게 상쾌할 수 없었다고 전했다.





# 긴 시간의 그림자

그러나 기회의 문은 준비된 자에게 열리는 법이다. 직장 생활을 했던 그에게 야근은 일상이었고, 주말 출근도 빈번했다. 그런 그가 회사를 그만두고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 안에 음반을 낼 수 있었던 건 10년간 출퇴근 자투리 시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출근할 때 마을버스를 타지 않고 일부러 걷는 시간을 가지면서 전날 썼던 멜로디를 떠올렸어요. 다음 파트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곡을 다시 탄탄하게 다듬고. 하루에 10분, 20분 투자한 시간이 제 곡을 단단하게 다지는데 큰 도움이 됐어요.”

그가 작곡한 곡은 해가 거듭될수록 차곡차곡 쌓였다. 그중 앨범 컨셉과 맞는 5곡을 골라 첫 음반으로 엮었다. 작은 시간이 모여 만든 그의 인생 2막이다.

“부지런했다기보다는, 음악에 대한 저의 자세가 다른 것을 대할 때보다 더 진지했었던 것 같아요. 조금씩, 천천히 꿈을 위한 준비를 해온 셈이죠.”



# 꿈이 있는 한 늦지 않았어

그의 첫 음반 ‘시작’에는 어쿠스틱 기타가 소박한 음색을 내며 조한의 커리어와 삶을 조명한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법한 가사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번 두 번쯤이나 세 번쯤 아니 네 번쯤은/ 가볍게 야근도 하고 술 한 잔 하고 나면/ 오늘이 목요일인지 아니면 수요일쯤인지/ 한없이 무거워지는 보통의 날들 안녕” (조한 1집 ‘시작’ 수록곡 ‘주말잠’)

직장인의 옷을 입고 있던 당시 그는 치열한 삶을 살았다. 외국계 회사와 업무를 진행하다 보니 시차 문제로 인해 생활의 리듬이 깨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정말 바빴을 때에는 새벽 4시에서 6시에 퇴근을 하고, 잠깐 집에서 샤워를 하고 다시 2시간 만에 출근하기도 했어요. 일을 하다 죽을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바빴었죠.”

그런 그에게 주말에 정말 오롯이 즐기는 잠은, 위로였고 치료였다. 이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던 그였기에 곡에 충분히 녹일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는 누군가를 토닥여줄 수 있는 곡을 쓰고 싶다고 했다.

“마흔이라는 나이를 곧 앞두고 음악을 시작하게 됐어요. 그런데 이제 100살까지 산다고 하잖아요. 곡을 쓰고 사람들 앞에서 노래할 수 있는 시간이 적어도 60년은 남아있는 거니까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더 많은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싶어요.”


# 인생에 대한 예의

유명한 일부 뮤지션이 아니고서야 홍대 인디신에서 활동하는 대부분의 음악가는 대체로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다. 조한 그도 언젠가는 다시 직장생활을 병행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주어진 상황에서 뮤지션이란 직업에 최선을 다해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다. 최소한 나 스스로에게 미안하단 생각은 들지 말아야 되는 거니까.

“마음속에 어떤 꿈을 품고 있으면,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오랜 기간 조금씩 준비해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내가 가슴속에 품고 있는 소중한 꿈을 그저 꿈으로 남겨두는 것은, 나에게도 꿈에게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dsun@heraldcorp.com


헤럴드의 콘텐츠 벤처, HOOC이 첫번째 프로젝트 <인스파이어ㆍINSPIRE>를 시작합니다. 영어로 ‘영감(靈感)을 불러일으키다’라는 뜻의 인스파이어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있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영감을 전달하고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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