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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둣방 아저씨와 마리엘라
icon이정아 HOOC Editor 2017.09.29 03:33 pm

[이정아 기자의 인스파이어]


‘다시 만나서 정말 기뻐요.’ 그가 수어(手語)*로 반가워했다. ‘신발을 가지고 왔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굽이 닳은 구두를 건넸다. 언제까지 손질을 해줘야 하는지 그가 수어로 물었고 나는 매직펜으로 화이트보드에 날짜를 적었다. 그는 환하게 웃어 보이더니 이내 코숭이 퍼진 밤색 구두를 집어 들고 헝겊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의 발밑에는 그의 손을 거쳐 반들반들 윤기가 흐르는 가죽 구두 네 켤레가 가로다지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오늘도 약수역 1번 출구 전용출 씨(57)의 두 평 남짓 구둣방에는 따사로운 가을볕이 감돌았다.

전 씨가 세상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건 다섯 살이었던 1965년이었다. 그는 홍역을 심하게 앓았고 사경을 헤맸다. 귀에서 피고름이 날수록 소리는 희미해져 갔다. 어머니는 병약했고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전 씨는 돈을 벌어야 했고 이발소로 갔다. 맨손에 구두약을 묻혀 손님들의 구두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열 살. 구두 한 켤레를 닦으면 손에 300원이 쥐어졌다.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어머니의 약 값을 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외로움은 늘 구두닦이 소년을 괴롭혔다. 사람들은 소년에게서 떠나갔고 불안한 밤과 빈곤이 그를 엄습했다. 열아홉 살 되던 해, 소년은 말하는 법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소리 내어 사랑한다는 말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괴로웠어요.” 세상하고 완전히 단절된 채로 자기 혼자서만 방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몹시 억울한 기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먼발치서 자신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만 기억한다고 했다.



사는 게 고단할 때마다 전 씨는 더욱 광이 나도록 구두를 닦았다. 김애식 노량진농인교회 목사(54)는 가슴을 치는 그의 수어를 통역해 줬다.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는 동작은 ‘답답하다’는 의미라고 한다. 전 씨는 구두를 수리하며 신발 주인이 이 구두를 신고 걷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신발을 보면 삶이 보여요. 어렵게 사는 사람은 신발이 못생겼거든요.” 그는 부드러운 천으로 정성 들여 구두를 문질러 광택을 냈다.

“지치고 고단한 표정이었던 손님이 제가 닦아준 신발을 신고 밝은 모습으로 나가요. 전 그게 한없이 기쁘고 좋아요. 말없이도 대화가 이뤄지니까.”

지난 10여 년간 이곳 구둣방을 찾은 김중자(61) 씨는 “주인아저씨가 닦은 구두는 얼마나 반짝반짝 윤이 나는지”라며 엄지를 치켜 올렸고, 약수사거리 모퉁이 식당 주인 송기택(56) 씨는 “이 분 새까만 손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이라고 했다.



구둣방 한편에는 이국적인 이목구비를 가진 여자 아이의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 속 아이의 이름은 마리엘라. 이곳 구둣방에서 1만3000㎞ 떨어진 지구 반대편 과테말라에 살고 있는 열네 살 소녀다. 소녀도 전 씨처럼 청각 장애가 있다. 사진 속 마리엘라는 버들눈썹 아래 호수 같은 맑은 눈을 가졌다. 소녀가 천진하게 방긋 웃고 있었다.

5년 전부터 전 씨는 마리엘라에게 매달 4만5000원을 부친다. 누군가에게는 작은 돈이지만, 전 씨에게는 구두 12켤레를 닦아야 버는 돈이다. 전세 보증금 1억 원이 전 재산인 그는 “가족들과 함께 모여 식사를 할 수 있고 편안히 잠 잘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했다. 지난해 7월부터는 하루에 만 원씩 더 모은다. 마리엘라가 살고 있는 집을 수리하는데 다소나마 돈을 보태고 싶어서다. 그해 10월 전 씨는 그렇게 모은 92만 원으로 화장실을 개조해줬다.

“아이가 울면 저도 눈물이 나요. 전 이를 악물고 버티며 살아야만 했던 사람인데, 이 아이가 닫혀 있던 제 마음의 문을 열게 해줬어요.” 


전 씨는 지금까지 마리엘라에게 19통의 편지를 보냈다. 마리엘라도 글이나 그림으로 답장을 보내왔다.

‘제가 매일 경험하는 그 모든 고통을 겪고 계실 거라고 생각하니 너무 슬퍼요. 아저씨, 어디 아픈 데는 없으세요?’

마리엘라에게 위로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전 씨는 마리엘라와 진짜 가족이 되었구나 생각했다. “바라는 거 없어요. 아이가 그저 아프지 않고 잘 자랐으면 좋겠어요.” 그는 마리엘라의 사진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찡끗 웃어 보였다. “아이의 신발이 돼주고 싶어요.”

열흘 뒤 약수역 1번 출구 그의 구둣방을 다시 찾았다. 광이 나는 구두를 신어 보았다. 한 걸음씩 아주 천천히 거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열 살배기 구두닦이 소년의 모습이 마리엘라의 모습과 겹쳐 한순간 눈앞에 아른거렸다.

“누군가는 부모에게 좋은 것을 받지 못할 수 있고 사회에서 여러 가지 거절을 받았을 수도 있어요. 저도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그런데 혼자라고 생각될 때 외롭게 서 있는 것을 너무 힘들어하지 말았으면 해요. 누구에게나 행복은 있어요. 생각보다 가까이에요.”

오늘 하루도 잘 살았을 이들에게 이 따사로운 가을볕은 너무나 공평하다. 올려다 본 청아한 가을 하늘빛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파랗고 눈부셨다.


*수어 : 수화 언어’를 줄여 이르는 말. 2016년부터 한국수화언어법이 시행되면서 수화도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언어로 공식 인정됐다. ‘손으로 하는 대화’라는 의미의 수화(手話)보다는 ‘손으로 하는 언어’라는 의미의 수어(手語)가 올바른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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