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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스파이어] 스트리밍의 시대, 음악을 새기는 사람들
[장필수 기자의 인스파이어]

“LP(long-playing record)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스트리밍과 LP 소리를 구분할 수 있나요?”

‘아날로그 감성’, ‘힙한 문화’, ‘개성 표출의 수단’과 같은 뜬구름 잡는 설명 외에 LP만이 가진 물성(物性)이 존재하는지 궁금했다. LP를 접해보지 못한 20대 ‘막귀’도 과연 스피커에서 튕겨 나오는 소리의 원천을 구분할 수 있을까. 
Long-play record. 흔히 줄여서 LP record, LP라고 부르는 이 매체를 찾는 젊은층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회현동 중고 LP가게의 주고책층은 40~50대 남성. 이들은 과거 향수를 찾아 LP 가게를 찾는다.

# “아날로그에는 용량이 없다”

올해 여름 국내에서 유일하게 LP 공장을 개장한 마장뮤직앤픽처스. 이곳에서 일하는 박종명 이사는 질문을 듣더니 싱긋 웃으면서 “아주 쉽게 구분됩니다”라며 운을 떼었다.

“카페 안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고 가정하자고요. 여기서 제가 음악을 들으면서도 친구랑 아주 낮은 톤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이 있구요. 음악 때문에 제 목소리를 계속 높일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어요. LP로 음악을 들으면 상대방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충분히 들립니다.”
LP의 작동원리는 간단하다. 턴테이블의 바늘이 LP표면에 새겨진 소리골을 타면서 흔들리면 앰프가 이를 전기신호로 바꿔 소리를 낸다. 그래서 LP의 노래는 용량으로 측정할 수 없다.

사람들이 LP에 본능적으로 좀 더 편안함을 느끼는 이유가 있다. LP는 CD나 MP3보다 넓은 대역폭의 음악을 담을 수 있다. 그래서 효율성을 추구하는 디지털 매체와 달리 압축하지 않은 원음 그대로의 소리를 전할 수 있다. LP애호가들이 말하는 ‘자연스럽고 풍성한 소리’, ‘오래 들어도 피곤하지 않은 소리’는 허풍이 아니다.

“편의성이나 효율성, 이런 부분에서 LP는 도저히 디지털 매체를 따라갈 수가 없겠죠. 하지만, 디지털 음악들이 거친 기계음처럼 들리는 경험을 할 때마다 LP가 좀 더 우월할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박 이사가 ‘돈 안 된다’는 LP 제작에 힘을 보탠 이유다.


# “음악 소비의 시대에 소장을 꿈꾸다”

하종욱 대표이사도 처음에는 “공장은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고 음악이 빠르게 소비되고 있는 지금, “(생각이) 바뀌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하 대표는 LP를 '음악의 선생님'이자 '인생의 비망록'이라고 했다. 처음 '평론가'라를 타이틀을 달게 해준 LP에게 가지는 애정이 그만큼 남다르다.

전달 방식이 CD→MP3→스트리밍(Streaming)으로 변하면서 음악을 빠르고 편하게 ‘찍어내는’ 환경이 조성됐다. 하 대표는 “음악은 ‘그 시대의 소중한 문화유산’이기도 한데 지금은 공을 들이지 않은 음악들이 MP3에 맞춰 규격화돼 너무 쉽게 소비되고 있다”며 “좋은 음악들이 복원될 수 있는 환경을 LP가 제공해줄 수 있다는 신념이 있다”고 강조했다.

마장뮤직앤픽처스 식구들을 놓고선 “크루세이터(Crusader)”라고 지칭했다. 국내 유일 LP 공장에서 일하는 이들의 자부심이 가볍지 않아서다. “음악이 쉽게 소비되는 시대지만, 소장하는 꿈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 대표가 전하는 마장의 사명이다. 
최고의 음질을 전달하는 게 목표인 만큼, 제작이 완료되더라도, 직원들이 하나하나 눈으로 반드시 확인한다. 번거롭지만 국내 최고의 LP는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

“LP가 엄청나게 잘 될 것이라는 절대적인 낙관을 가지고 있지는 않아요. 디지털을 능가할 수도 없을 겁니다. 다만, 맞은편에 서서 아날로그 음악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치료제’ 역할을 하게 될 거라 생각해요. 가장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하는 대표지만 감사한 일이지요.” 하 대표에겐 마장 식구들의 존재가 심적 변화를 준 결정적인 계기였다.


# “‘아, 잘했네’라는 반응까지 10년”

마장 식구들의 공장이 올해 6월 문을 열기 전까지 준비기간만 10년이었다. 공장 설립ㆍ기계 제작을 책임졌던 백희성 실장은 2007년부터 LP 제작의 핵심인 커팅 기계를 찾기 시작했다. 소리골을 새길 커팅 기계가 있어야만, 대량 생산을 위한 최초의 LP인 ‘마스터 레코드’를 제작할 수 있어서다. 
백 실장은 원래 항공정비사였다. 회사에서 받은 보너스로 전축을 사면서 LP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사진은 백 실장이 커팅머신을 조작하고 있는 모습.

2년 만에 커팅 기계를 찾고 나서부터는 뿔뿔이 흩어진 기술자들을 찾아 전국을 누볐다. LP를 찍는 프레싱 플랜트 시스템도 수입 기계를 쓰다 3년의 제작 기간을 거쳐 결국엔 국산화를 이뤄냈다.

그리고 시판용 LP가 나올 때까지 3년간 총 3만 장 이상을 수없이 찍어냈다. 음질, 오직 음질을 위해서였다. “미국이나 일본에서 판매하는 고품질의 LP를 턴테이블에 얹어서 들어보면 ‘와, 참 잘만들었다’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찍다 보니까 오기가 생겼어요.” 선배 기술자들로부터 귀동냥한 토막토막의 지식이 담긴 노트를 베개 삼아 지내던 시절도 있었다. 그만큼 절실했다.

LP 제작에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말해달라는 물음에는 “시판 직전 까다로운 우리나라 클래식 애호가들로부터 ‘아, 잘했네’라는 간단한 반응이 나왔을 때”라고 말했다. 이 바닥에선 이 정도가 가장 최고의 찬사라고 한다. 
프레스에 스탬프를 끼워넣는 모습. 위아래로 스탬프를 놓고 나서 LP의 원료인 PVC 뭉치(햄버거)를 넣고 눌러주면 완성된다.


아직도 프레스 위에 LP를 올릴 때마다 설렌다는 백 실장은 최근 기계를 개조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인디쪽에서 어렵게 음악 하시는 분들한테도 좀 저렴하게 LP를 생산해 많이 배급하면 좋겠다.” 힘겹게 LP를 되살린 그의 작은 바람이다.


# ‘No Music, No Life’

세 사람 모두에게 ‘당신에게 LP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했다. 박 이사는 여기서 대뜸 “일본에 타워레코드의 캐치프레이즈 (catchphrase)가 뭔지 아세요?”라고 되레 묻더니 “‘노 뮤직 노 라이프(No Music, No Life)’. 여기서 뮤직’이 뭐냐고 물으시면 저는 LP라고 답할게요”라고 답했다.





* 헤럴드의 콘텐츠 벤처, HOOC이 첫번째 프로젝트 <인스파이어ㆍINSPIRE>를 시작합니다. 영어로 ‘영감(靈感)을 불러일으키다’라는 뜻의 인스파이어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있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영감을 전달하고자합니다.

스스로에 대한 자극과 영감을 갈망하는 이들이라면, 인스파이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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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entia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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