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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스파이어]‘일 좀 한다는 회사’들이 앞다퉈 적용하고 있는 조직문화


[서상범기자의 인스파이어]2년차 대기업 직원 A 씨. 신입사원의 티를 벗고, 어느정도 조직에 적응을 마쳤다. 이제는 제대로 된 일을 통해, 한 몫을 톡톡히 해내고 싶다는 의욕에 가득하다. 그러나 A 씨의 의욕이 꺾이는 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야심차게 제안한 프로젝트 아이디어가 대리-과장-차장-부장을 거치는 동안 내용 자체가 애매해졌고, 결정적으로 사장의 장기간 출장으로 인해 결재타이밍을 놓치면서 유사 서비스가 시장에 나와버린 것. 그는 빠르게 돌아가는 시장상황 때문에 타이밍이 생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온 경쟁자에게 덜미를 잡힌 것이다. A 씨는 말한다. 시장, 고객을 위한 일을 하기 위해 회사를 다닌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일을 위한 일을 하는데 소모되는 시간이 더 많다고. 일을 일답게 할 수 있는 환경, 문화가 있는 기업으로 옮기고 싶다고. 
사전적 의미로 ‘민첩한, 날렵한’이란 애자일은 2000년대 초반 미국 실리콘밸리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의 방법론에서 시작했다. 이후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유수의 IT 기업에서 방법론을 넘어 조직문화, 경영기법에 있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고 있다.(그래픽=허연주 디자이너)

A 씨와 같은 고민은 비단 직원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기업들, 특히 대기업들의 경우 조직문화와 생산성 차원에서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고민이다. 이 고민의 방점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의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데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 그리고 살아남기. 이 두가지의 조건에서 기업들은 생존의 방식으로 다양한 실험을 조직에 접목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애자일(Agile) 혁신(이하 애자일)’이다. 사전적 의미로 ‘민첩한, 날렵한’이란 애자일은 2000년대 초반 미국 실리콘밸리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의 방법론에서 시작했다. 이후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유수의 IT 기업에서 방법론을 넘어 조직문화, 경영기법에 있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넷플릭스, 구글, 아마존이다. IT를 기반으로 한 이들은 새로운 서비스를 내놓을 때 무엇보다 먼저, ‘빠른 출시’에 초점을 둔다. 그리고 그 이후에 유저의 피드백을 즉각적으로 반영하면서, 수정하고, 더 좋은 서비스를 만들어낸다.
사전적 의미로 ‘민첩한, 날렵한’이란 애자일은 2000년대 초반 미국 실리콘밸리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의 방법론에서 시작했다. 이후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유수의 IT 기업에서 방법론을 넘어 조직문화, 경영기법에 있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고 있다.(그래픽=허연주 디자이너)

시장의 반응을 빠르게 판단하고, 선택과 집중을 함으로써 ‘패스트 무버’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기업들 역시 애자일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추세다. 특히 최근에는 금융회사들이 상당히 적극적이다. 보수적이고 안정지향성이 강한 금융회사들이지만, 모바일 금융 등 환경자체가 디지털라이제이션(Digitalization)으로 바뀌면서 더이상 기존의 가치를 고수할 수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KB국민은행, KB카드, 하나은행 등 어지간한 금융 회사들은 올해 애자일 조직의 도입을 천명하고, 실행에 나서고 있다.

그 중에서도 현대카드ㆍ현대캐피탈(이하 현대카드)이 가장 돋보인다. 이 회사는 몇 년 전부터 애자일을 위한 밑그림을 꾸준히 그려왔고, 올해 2월 본격적으로 애자일 조직 체계를 구성했다. 
현대카드ㆍ현대캐피탈은 올해부터 조직 전체에 애자일 혁신을 도입했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의 환경에서, 금융회사의 전통적 경직성을 버리기 위한 움직임이다.

이 회사의 사례로 애자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현대카드는 조직 개편으로 ‘본부-부본부-실-팀-센터’로 구성된 체계를 ‘본부-실-팀’ 3단계로 단순화했다. 이를 통해 50여개의 부본부와 센터는 폐지됐다. 또 감사나 재무 등 법규상 필요한 기간팀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조직을 애자일 운영 원리가 적용되는 ‘자율팀’으로 재편, 인력 구성부터 팀 신설 및 폐지까지 모든 인사권을 실장에게 부여했다, 예전 같으면 팀 단위 작은 인사이동이라도 인사라인을 거쳐 회사 차원의 결재가 있어야 했지만, 신속하고 능동적으로 조직을 운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조직 구조의 단순화와 동시에 일을 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자율팀과 같은 애자일 조직은 기능별로 고정된 대규모 팀들이 하나씩 업무를 받아 일을 처리하는 전통적인 기업의 조직과 다르다. 시장 상황과 이용자 반응에 따라 작은 단위로 핵심 업무를 만들어 빠르게 각 팀에 배분해 일을 처리한다. 조직이 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이 조직을 만드는 것.

구체적인 예가 새로운 가맹점 발급 카드(PLCC) 개발을 목표로 꾸려진 팀이다. 이들은 상품 개발, 가맹점 관리, 운영 등 각 분야에서 전문성과 경험이 풍부한 직원 6명이 한 팀이 됐다. 특히 이 팀은 해당 팀원들이 기존의 업무에서 완벽하게 손을 뗐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특정 임무를 위해 구성되는 태크스포스(TF)의 경우, 원래 했던 일과 함께 새로운 업무도 같이 맡아 효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기가 쉽지 않다. 기존 대기업들이 너도나도 도입해온 ‘실속 없는 애자일’이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그러나 현대카드의 자율팀은 기존 부서장의 협조와 파견 발령 등의 인사 조치로 자율팀 팀원들이 오롯이 해당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준다.
애자일은 조직이 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을 위해 조직을 만든다.

이 외에도 모든 문서를 자유롭게 수정, 확장할 수 있는 컨플루언스 프로그램을 통해 불필요한 보고 체계를 없애고, 상사의 눈치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업무 문화도 적용중이다.

특히 조직 문화의 개선은 애자일 혁신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스템과 체계의 변화를 실체적으로 가능케하는 것은 변화의 철학에 대한 조직원들의 공감이기 때문이다.

조직원들의 공감을 통해 애자일 혁신을 성공시킨 대표적인 사례가 네덜란드 대표 금융회사인 ING은행이다. 2015년 이들은 조직을 송두리째 바꾸는 실험을 했다. 바로 애자일을 통해서였다.

당시 디지털 전환으로 5000여개 이상이던 네덜란드 은행 지점들 중 70% 이상이 문을 닫았다. 디지털 뱅킹의 보편화로 인해, 고객들의 패턴이 달라졌고, 당연히 일을 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했던 것이다. 여기에 2000년대 후반 M&A를 통해 시도했던 성장도 큰 효과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애자일을 조직의 근간을 이루는 새로운 문법이자, 언어로 선택했다. 하지만 이를 조직의 DNA로 심기위해 경영진의 일방적인 통보, 전달이 아닌, 상당히 드라마틱한 이벤트를 시작했다.

애자일 혁신을 출범하는 당일, 전 임직원을 암스테르담 아레나 스타디움에 소집해 전원 해고했다. 물론 실질적으로 해고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일이 아닌, 새로운 일, 업무, 가치에 집중해야 한다는 상징적 의미였다. 실제 이들 직원들은 얼마 후 새로운 직책으로 전원 재발령이 됐다. 재발령의 근간이 된 개편안은 최고경영진이 9개월간 치밀하게 준비를 해왔다. 현재 ING 은행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혁신조직이자, 기민한 의사결정을 자랑한다. 
의사결정 단계에서 벽에 가로막혀 시간을 낭비하는 곳들이 많다. 그러기엔 경쟁은 너무나 치열하다. 그 벽을 지금 당장 없애버리자

그래서 애자일을 추구하는 조직이 단순히 빠른 작업, 생산성의 향상을 목표로 한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조직원의 공감과 변화에 대한 이해가 빠진 애자일은, 자칫 기존의 수직계열화 시스템은 그대로인 상황에서, 속도감만 강조하는 이른바 ‘한국형 애자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직원들에게 과감히 실행하고, 빨리 실패하고, 다시 또 도전해볼 수 있는 문화와 환경을 심어주는 것이다. 또 애자일이 정착되면 직원 뿐 아니라 경영진에게도 도움이 된다. 소모적인 결재를 위해 버리는 시간을 아껴, 경영진이 그려야 할 큰 그림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게된다.

직원과 조직 모두가 성장할 수 있는 철학인 것이다.

다시 A 씨의 이야기로 가보자. 만약 A 씨의 조직이 애자일을 도입했다면 이야기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서비스는 트렌드에 맞게 신속하게 출시됐을 것이고, 경쟁사를 오히려 압도했을 수 있다. 또 이 과정에서 A 씨 스스로의 역량에 대한 발전, 그리고 일과 조직에 대한 만족감도 커졌을 것이다.

일다운 일에 집중하고, 변화를 위해 과감히 도전하는 애자일 문화. 이것이야말로 급변하는 환경속에서 생존을 도모하는 현대의 조직이 고민해야 할 가치가 아닐까?

tiger@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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